이중톈 중국사 - 02 국가

이중톈 중국사 - 02 국가

  • 자 :이중톈
  • 출판사 :글항아리
  • 출판년 :2014-04-18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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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제2권 ‘국가’ 출간



왜 모든 문명은 공통적으로 ‘국가國家’를 필요로 했을까?

그리스, 로마는 물론 미국과 인도의 역사까지 종횡으로 비교하여 중국 문명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명확하게 핵심을 짚어 서술했다.

국가의 기원, 국가의 발달, 국가 속 제도의 차이의 전세계 비교를 통해 하·상·주의 중국 고대국가의 진면목을 밝힌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세계 문명 속의 중국 문명’을 깊이 살피고 ‘중국 문명 속의 공동의 가치’를 찾아, 결국 ‘중국인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 하는 이 3대 문제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맞서야 한다. ‘국가의 논리’를 밝혀야만 ‘문명의 궤적’을 알고, 또 중국 문명의 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 _ 작가 후기





‘이중톈 중국사’ 제2권 『국가』의 핵심 메시지



제1권 『선조』에서 중국 고대문명의 모계사회적 출발과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토템이라는 아이콘의 전복을 시도했던 이중톈은 제2권 『국가』에서 세계 문명과의 비교를 통해 도시 건설을 통해 ‘국가國家’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도시都市’는 국가의 상징이자 문명의 이정표다. 도시를 세운 민족은 하나같이 동시에 국가를 세웠고, 또한 국가를 세우면 곧장 문명으로 진입했다. 도시는 곧 ‘문명의 지표’다. 왜 도시가 나타난 뒤, 부락이 국가로 변했을까.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다. 씨족과 부락은 ‘족민族民’으로 이뤄졌고 도시는 ‘시민’으로 이뤄졌으며 국가는 ‘국민’으로 이뤄졌다. 족민과 시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족민은 혈연관계이거나 적어도 ‘범泛혈연관계’다. 그렇지 않으면 혼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시민은 그런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니다. 그들은 공적인 관계여서 ‘공민公民’이라고도 한다. 이 말에 해당되는 그리스어의 뜻은 ‘폴리스의 인간’이다.

‘공민’이 있으면 ‘공공관계’와 ‘공공업무’가 있게 된다. 이 관계와 업무들을 처리할 때는 씨족과 부락 시대의 풍습이 쓸모없어진다. ‘공권력’과 ‘공공규범’에 의존해야 하고, 또 공공규범에 따라 공권력을 행사하는 ‘공공기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다 공민은 아니다. 정반대로 인류 문명의 초기에 국민의 절대다수는 ‘신민臣民’이었다.

샤머니즘이 인도에서는 종교로, 그리스에서는 과학으로 변했다. 토템은 이집트에서 신으로, 로마에서는 법으로 변했다. 원시문화는 이렇게 완전히 탈바꿈했다.

종교는 ‘국경 없는 국가’이며 법은 ‘토템 아닌 토템’이다. 그것들이 공통되게 실현한 것은 ‘아이덴티티’였다. 모든 국가 체제와 국가 노선은, 세계 각 민족이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안전과 자유와 아이덴티티를 실현하기 위해 행한 서로 다른 선택과 탐색에 불과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비밀이며 국가의 논리다.

중국 문명이 여느 문명들과 다른 점은 샤머니즘이 과학으로도, 종교로도 변하지 않고 윤리와 예술, 즉 예악으로 변한 것이다. 또 토템은 신으로도, 법으로도 변하지 않고 조상으로 변했다. 생식 숭배(여와, 복희)에서 토템 숭배(염제, 황제)로, 이어서 조상 숭배로 변한 것이 곧 중국이 걸어온 길이다.

바꿔 말해, 다른 민족들은 신이나 법, 아니면 관념에 의존해 아이덴티티를 확보했지만 오직 중국인만 조상 숭배를 택했다. 하나라의 계가 선양제를 폐지하고 요·순·우가 하·상·주로 변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진·한부터 명·청까지 군주제가 반석처럼 견고했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조상 숭배’가 생겨서 비로소 ‘가족-국가 체제’가 생겼고, 또 하·상·주로부터 원·명·청에 이르는 3700년의 문명사가 생겨났다. 아울러 ‘중국’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명확히 정리할 수 있다. 이른바 ‘중국’이란 ‘당시 선진 문화의 중심’이었고 하·상·주는 그 ‘세 대표’였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단한 탐색을 진행하여 마침내 중국 문명의 기초를 다졌다.

기초는 견고했고 영향도 오래 지속되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것이든 그 당시로 기원을 소급해볼 수 있다. 문자기호와 문화심리, 문명의 방식과 핵심 가치가 다 해당된다.

따라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하라파, 마야, 페르시아, 비잔티움 제국처럼 파괴되고 끊어지고 쇠망한 문명과 비교해, 그리고 끊임없이 바뀌는 서양 문명과 비교해 중국 문명은 ‘초안정적’이다. 이런 ‘초안정성’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한 원인 규명이다.

이로써 이중톈은 중국사 2권의 항해를 마친다. 3권의 항해를 위해 다다를 다음 역은 주나라인들의 발상지 ‘주원周原’이다.





5대 문명은 왜 강성해지면 국가를 세우려 했나

국가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국가의 논리는 무엇인가




5대 문명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당시의 부락들은 강성해지기만 하면 국가를 세우려 했을까?

그리스, 로마의 황금시대와 은의 시대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대동大同’에 해당된다. 대동세계의 특징은 ‘천하위공天下爲公’, 즉 천하가 모든 이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청동시대를 유가에서는 ‘소강小康’이라고 한다. 소강세계의 특징은 ‘천하위가天下爲家’다. 재산은 사유화되고 권력은 세습되며 전쟁도 불가피하다. 예의, 도덕과 성인, 명군明君은 객관적 형세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마지막으로 철의 시대를 유가에서는 ‘난세亂世’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대동, 소강, 난세는 유가의 3단계 역사관이다. 요순堯舜 시대는 대동, 하夏·상商·주周 시대는 소강, 춘추전국시대는 난세다. 또한 이 3단계 역사 시대에 맞춰 세 가지 정치철학이 존재한다. 대동세계에는 제도帝道, 소강세계에는 왕도王道, 난세에는 패도覇道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유가의 관점일 뿐, 다른 제자백가도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장자는 ‘희황羲皇(복희伏羲)의 치세’만을, 묵자는 ‘대우大禹(하나라의 우)의 치세’만을 인정했다. 어떻게 보면 중국사도 4단계인 듯하다. 여와女?에서 복희까지는 황금시대, 염황(염제炎帝와 황제黃帝)에서 요순까지는 은의 시대, 하·상·주는 청동시대, 춘추전국시대 이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의 시대다. 앞의 세 단계에 대해서는 각 학파 간에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마지막 단계는 법가法家를 제외하고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국가는 문명시대와 선사시대의 분수령이었다. 공자가 소강을 부정하지 않고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郁郁乎文哉, 吾從周”라고까지 말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떠오른다. 왜 국가를 세워야만 문명시대에 들어섰다고 하는 걸까? 국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사람은 정말로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동물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또 왜 수많은 사람이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다고 씨족과 부락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걸까? 국가의 논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중국과 서양, 각자의 길을 가다



순자荀子는 국가의 논리가 사람에게 있다고 말했다. 순자는 유가에서 법가로 가는 환승역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법가처럼 국가와 군주를 긍정했다. 왜 긍정했을까? 생존을 위해서였다. 순자는 사람이 가엾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힘도 소보다 약하고 속도도 말보다 느려서 생존능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와 말이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사람이 무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반대로 무리가 해체되면 사람이 소, 말보다 못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첫째로 도덕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군주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 국가가 있어야 한다.

순자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다리가 두 개에 털이 없는 것二足而無毛’만이 아니라고 했다. 물과 불은 물질적 형태가 있지만 생명은 없으며 초목은 생명이 있지만 지각은 없다. 동물은 지각이 있지만 도덕은 없다. 오직 사람만이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인류의 가장 강력한 집단인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집단의 가장 적합한 리더인 군주도 고안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덕은 가장 이상적인 조직력이다. 도덕이 있어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또 국가가 있어서 사람은 심신을 편안히 맡길 곳을 확보한다.

군주는 핵심이고 도덕은 힘이며 국가는 귀속처다. 국가와 사람은 이렇게 단단히 결합되었다.

이것은 서양과는 조금 다르다.

서양인들도 국가를 필요로 했지만 군주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는 군주가 없었다. 초대 황제는 스스로 공화국 ‘제일의 시민’이라고 칭해야 했다. 또한 17세기 암스테르담은 국왕보다는 차라리 세 개의 튤립 구근을 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독립전쟁 이후의 미국인들은 국왕뿐만 아니라 통일국가조차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마지못해 제헌의회를 열고 한참 만에 초대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로써 군주에 대한 서양인들의 태도가 어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민족의 국가사와 문명사는, 줄기차게 독립·자유·평등을 추구했지만 번번이 얻는 데 실패했거나 얻고도 금세 잃어버린 ‘비애의 역사’다. 그리스가 직접민주제를 실행했듯이 중국도 ‘직접군주제’를 시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로마가 법치를 실현한 것처럼 중국도 예치禮治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와 방안들은 오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분권은 집권으로, 집권은 전제로, 전제는 독재로 변했다.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가면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위기와 부패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서양 열강을 스승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문명은 성城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모든 고대 문명은 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오래된 문명국들은 모두 자신들의 도시를 가졌다. 아수르(아시리아의 중심 도시), 바빌론, 멤피스(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의 왕도), 예루살렘처럼 유명한 도시도 있고 이집트의 나카다와 히에라콘폴리스, 인도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크레타의 크노소스처럼 아는 사람이 드문 도시도 있었지만, 어쨌든 도시가 없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대 민족의 건국사는 동시에 도시건축사였다.

영토국가든, 도시국가든 모두 도시가 있고 도시를 중심으로 삼아야 했다. 그래서 ‘국國’은 반드시 ‘혹或’ 자 바깥에 ‘구口’가 있어야 한다. ‘혹或’은 기반이 생긴 것을 표시할 뿐이다. ‘구口’가 바로 도시가 생긴 것을 표시한다. 사실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국國’은 곧 성城이며 성은 곧 ‘구口’였다. 예를 들어 ‘국문國門’은 성문을 가리켰고 ‘국중國中’은 성 안을 가리켰다. 만약 영토국가이면 ‘국國’은 수도를 가리켰다. 참고로 ‘중국中國’의 본래 뜻은 ‘천하의 중심’으로서 전 세계의 중심 도시를 말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수도가 있는 중원 지역을 뭉뚱그려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성城의 문제는 바로 도시都市의 문제와 연결된다



국가 건립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안전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북경에는 이미 성벽이 없다. 세계 각국의 도시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국가의 의의와 비밀이 여전히 도시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상하이上海가 답해줄 것이다.

민주국가의 시민들은 반드시 ‘배신’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도 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다. 처칠은 바로 이런 이유로 교체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국가의 시민들도 배신을 당하곤 한다. 페리클레스가 물러난 후 변변찮은 자들이 숱하게 권좌에 오른 것도 다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모두 임기가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사람을 잘못 보고 선출하더라도 후회하고 고칠 여지가 있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제도”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가장 안 나쁜 제도’다.





그리스는 왜 망했으며, 인도와 중국의 공통점과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의 쇠락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잃은 것이 원인이었다. 무엇을 그리스 정신이라고 하는가? 독립과 자유, 과학과 민주주의다. 그러나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불철저했던 것처럼 그들의 독립, 자유, 평등도 불완전했다. 남의 아내와 간통한 자는 목숨을 내놓아도 강간한 자는 벌금형에 그쳤다. 강간은 여자의 권익을 해칠 뿐이지만 간통은 남자의 존엄에 도전하고 재산까지 남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괴한 논리를 고집한 결과, 그리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은 비슷한 점이 대단히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과 인도도 메소포타미아, 즉 ‘두 강 사이의 땅’이다. 중국의 두 강은 황허 강과 양쯔 강이며 인도의 두 강은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이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그 두 강 유역은 확 트인 평지여서 전략상 반드시 싸워 취해야 하는 곳이지만, 중국과 인도의 경우는 바깥과 차단되어 있다. 화약 무기가 없던 시대에 호전적인 서쪽 야만족들은, 드물게 아주 강대한 세력을 제외하고는 이 두 지역을 침공하기 힘들었다.

종교는 샤머니즘의 ‘차남’이다. 샤머니즘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양식 중 하나다. 시간적으로 그 앞에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도구의 발명과 사용뿐이다. 거의 모든 민족이 원시시대에 샤머니즘을 가졌다. 인도의 베다를 보면 상고시대 샤머니즘에 관한 기록이 적잖이 눈에 띈다. 중국 민족도 마찬가지다.

샤머니즘은 왜 있어야 했을까? 육체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영혼의 안정을 위해 있어야 했다.





강소국 로마는 ‘종교’와 ‘법’으로 세계문명을 지배했다



로마인의 변화가 가장 불가사의하다. 그들은 토템을 법으로 바꿨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로마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753년 로마가 성을 짓기 시작한 시점에 이집트인은 벌써 피라미드를 지었고 페르시아인은 조로아스터교를 만든 뒤였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베다』가 다 완성되었으며 중국은 동주 시대에 들어섰다. 그리스도 이미 여섯 번째 올림피아 제전을 개최하였다. 그러면 이때 로마는 무엇이었을까? 손바닥만한 소국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기독교와 로마법을 남겼다. 로마법은 확실히 탄복할 만하다. 그것은 엄밀한 논리와 명확한 체계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중국 하·상·주는 어떤가



“권력을 이용해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진한秦漢이 되어서야, 심지어 진한 이후에야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 지표는 바로 ‘중앙집권적 군현제郡縣制’였다. 그 전까지는 기나긴 성장기였다.

이 오랜 문명의 탄생을 재촉한 산파는 하계夏啓였다. 하나라의 군주는 ‘후后’라고 불렸기 때문에 ‘하계후夏啓后’라고도 했다. 하는 국호이고 후는 왕의 직함이며 계는 인명이다. 그 중에 후는 본래 뜻이 ‘낳는 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하계는 선양제禪讓制를 폐지하고 세습제를 창시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요순시대의 부락연맹은 부락국가로 변했고 중국민족은 문명시대로 접어들었다.

‘계폐선양啓廢禪讓’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사 최초의 대혁명이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전부 헛소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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