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체성

조선의 정체성

  • 자 :박석희, 최식원, 황금희
  • 출판사 :미다스북스
  • 출판년 :2013-02-21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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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나 사치하지 말라!”



600년을 넘어 오늘에 이어지는

세종의 위대한 민본철학과 시대정신

경복궁에 담긴 조선의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전면적 스토리텔링



숭례문 복원으로 본 세종 시대 건축의 의미

- 국가를 알려면 그 국가가 관리하는 건축물을 먼저 보라




관리 소홀로 불타버린 숭례문 복원 완료 시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사건 당시,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타버린 숭례문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던 사람도 무척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건물의 화재 발생 상황을 대비한 최초의 매뉴얼을 만든 사람이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전의 숭례문 모습. 오는 4월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된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소방기관은 세종 8년에 세워진 금화도감이다. 그런데 이 금화도감이 세워지기 3년 전에 만들어진 「금화조선」이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소방 매뉴얼이다. 여기에는 화재예방의 방법은 물론이고 화재 발생 시 전파 요령과 대처 요령, 인력 투입 등에 관해 상세히 적혀 있다. 심지어 근정전이나 숭례문 같은 높은 건물의 지붕에 화재가 날 경우를 대비하여 지붕에 신속하게 오를 수 있도록 건물에 쇠고리를 미리 비치해놓도록 하라는 세심한 지시까지 적혀 있어, 오늘날 숭례문의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도 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 초기부터 건물의 화재예방에 신경을 기울였던 것은 당시 한양의 건축물들이 단순히 건물이 아닌, 일종의 상징물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숭례문을 포함한 서울 도성의 건물들은 저마다 조선 왕조 초기 통치의 이상인 유교적 이상사회의 원리에 따라 계획적으로 지어졌다. 굳이 세종 시대에 금화도감을 설치하게 된 까닭도 분명하다. 건축물을 통한 이상 사회의 구현이라는 원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또 가장 많이 시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세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조선에 대해 알려면 경복궁을, 경복궁에 대해 알려면 세종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경복궁을 둘러보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곳의 주인인 세종의 시선으로 둘러보는 것이다.



이 책, 『조선의 정체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세종대왕의 하루하루를 통해 조선의 정체성과 역사를 재구성해내는 역사 스토리텔링서이자 궁궐안내서이다. 기존의 궁궐 관련 서적이 단순히 전각의 유래를 설명하거나 궁중 내 큰 사건을 나열하며 건축학적 해석을 곁들이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은 말 그대로 ‘세종의 입장이 되어’ 경복궁 건물을 산책하듯 거니는 구조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책이다. 기본적인 경복궁의 답사 코스인 근정전까지의 코스는 1장과 2장에서 서술하며, 각 장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풍부한 참고자료, 심지어는 드라마의 한 장면까지 인용하여 다채롭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한글 창제의 고민을 따라 걷기’, ‘세종 르네상스로 불리는 찬란한 문화를 보며 걷기’, ‘세종이 이룬 세계최초의 업적을 찾아 걷기’ 등 테마에 맞춘 구성에 따라 책을 들고 경복궁을 천천히 거닐다보면 어느새 세종에 대해, 경복궁에 대해, 무엇보다 세종이 경복궁을 통해 구현하려 한 ‘조선의 정체성’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경복궁 건축에 숨은 세종의 꿈

- 세종이 확립한 것은 왕권만이 아니라 조선의 정체성이다




세종대왕은 민족의 성군이자, 위대한 학자,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로서 그의 업적은 우리의 말인 한글부터, 천문학, 공학, 예술과 애민 사상이 숨어 있는 의료와 구휼 정책까지 말 그대로 광범위하다. 그의 업적만을 나열하는 데에도 한 권의 책이 아닌 한 질의 전집이 필요할 정도다. 그가 만든 최초의 업적 역시 적지 않아 이 책의 저자들은 그에 대해 한 챕터를 고스란히 할애해 놓고 있다. 이 책의 5장, 「세종이 만든 세계 최초와 함께 경복궁을 산책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들은(그리고 독자들은) 세종의 발걸음을 따라 걸으며 근정전에서 앞서 말했던 최초의 소방 매뉴얼을 발견해내고, 최초의 여론조사를 세종이 실시했음을 알게 된다. 수정전에서 최초의 독서휴가제도인 사가독서제를, 교태전에서 최초의 육아휴가제도와 남편출산휴가제도를 만난 후에는 오늘날의 회사에서도 흔치 않은 복지가 이미 세종 시대에 시작되었음을 알고 감동에 젖는다. 그 외에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초의 2단로켓 산화신기전, 최초의 고아원, 측우기와 수표로 알려져 있는 최초의 체계적 기상관측 기록도 있으며 산책의 마지막쯤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경복궁 후원에서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익숙한 최초의 온실까지도 만날 수 있다. 그 외에도 세종 르네상스로 표현되는 조선의 체계적 의학, 천문학과 주체성의 대표 주자인 전통음률 등 세종 시대의 많은 업적들을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업적이지만 저자들은 세종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해낸다. 세종의 위대함은 그가 일구어낸 수많은 발명품과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대통합을 일궈 이후 조선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소위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한 데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책 속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세종의 업적들은 모두 그 정체성 아래서 거두어낸 열매인 셈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조선의 정체성은 ‘백성을 대하는 자세’와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 ‘과학적 사고방식’ 등이다. 헌신으로 표현되는 애민과 소통, 그리고 합리성을 내세운 리더십이 세종이 세운 조선의 정체성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유교적 이상사회의 원리에 따라 낡은 것은 폐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세종의 능동적인 개혁으로 구현된다.



집현전. 지금은 수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이곳을 제대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건물 우측의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심어놓은 것이다.

조선이 개국되던 당시를 돌아보자. 조선 천지에 한바탕 광풍이 몰아치다가 잠잠해지더니 세종이 등장한다. 고려를 되살리겠다는 온건보수파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과격신진세력 간의 피가 튀는 난세에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에 세종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와 관습을 일신하는 등 전반적인 국가체계를 마련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럼으로써 혼미 속의 조선이 이후 지속할 수 있게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왕권을 확립하기보다 왕권이 장차 확고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공인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들의 해설에 따르면 이러한 세종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세종 시기의 법궁이자 조선 왕조 유일의 법궁,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세종이 만들었다?

- 이상적 리더십을 건축으로 구현한 경복궁의 진정한 주인, 세종




흔히 경복궁을 만든 사람을 태조 이성계로 꼽곤 하는데, 사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태조를 포함한 그 이후의 왕들은 경복궁을 만들기는 만들었으되, 가끔 들러 수리만을 꾸준히 했을 뿐 정작 법궁(모든 궁궐의 표준이 되는 정통 궁궐. 그 외의 궁을 이궁이라 부른다)으로 사용하진 않았다. 이렇듯 법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외면되어 오던 경복궁을 비로소 법궁답게 사용한 최초의 임금이 세종이다.

즉위식을 경복궁에서 올린 세종은 태종이 승하한 후 경복궁을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어가기 시작한다. 광화문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각 이름을 다시 지었으며, 동궁, 신무문, 보루각, 흠경각, 교태전 등을 새로 건설하고, 사정전, 경회루 중수, 광화문, 강년전을 개축하는 등 오늘날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건물들이 세종의 시기에 새로 태어났다. 이는 당시 궁궐에는 단순히 ‘왕이 살고 정치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당대 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욱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태종 승하 이후 경복궁을 법궁답게 일신하며 세종은 그 안에 자신이 바라는 조선의 정체성, 혹은 유교적 이상사회의 통치원리를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이다. 경복궁을 처음 만든 사람이 태조였다면 세종은 말 그대로 경복궁의 진정한 주인인 셈이다. 게다가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경복궁이 사용된 시기는 길지 않지만, 그 시기는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어김없이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 중 가장 빛나는, 또 가장 최초의 시기가 바로 세종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이렇듯 세종이 일신한 경복궁 속에는 세종 자신과 신하들, 왕족들이 만들어낸 내밀한 이야기 역시 적지 않게 숨어 있다. 자경전을 짓는 일화를 보면 어머니 원경왕후에 대한 그의 효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세종이 생전에 의학과 약학의 정리에 힘을 쏟았던 원인 역시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의 설립이 늦어졌던 이유를 살피면 건국 초기의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그 혼란한 시기 속에 장자도 아닌 셋째아들로 태어나 주목받지 못했던 세종이 우여곡절 속에 임금이 되어 수많은 사대부들과 논쟁하고 설득시키며 이루어낸 결과는 그 하나하나가 감동적인 드라마와 같다. 그러나 세종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창조를 했는지 아는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경복궁을 조선의 법궁으로 자리매김하고 수많은 창조물을 탄생시킨 세종의 시각은 과연 남달랐을 것이지만, 이를 느낄 수 있는 기회도 그리 자주 오진 않는다. 그러나 여기 세종대왕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그의 시각으로 경복궁을 둘러보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했겠는가?





궁궐을 알려면 주인인 왕이 되어야 한다

- 세종의 시선으로 경복궁을 걸어보자




답사의 열풍을 타고, 우리 궁궐 답사에 대한 열풍 역시 달아오르고 있다.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거리가 가깝다는 점 역시 이에 한몫하고 있다. 서점에 가보면 이에 대해 출판된 책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궁궐을 궁궐 그 자체로만 바라보며 서술했다는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건물에 대한 소개를 하고,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거나, 건축의 특색을 논하는 식의 정보전달식 책들만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궁궐은 건축 이전에 생활공간’이라는 기치를 걸고 쓴 책도 많지만 이 역시 학술적 건물 해설에 역사적 사건을 덧붙인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은 무엇보다 궁궐, 특히 경복궁의 진정한 주인인 세종 단 한 사람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무엇보다 경복궁은 ‘세종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궁궐의 주인은 왕이기에 결국 주인인 왕의 시선으로 걸어보아야 그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콘셉트에 걸맞게 저자들은 경복궁 사이사이에서 세종의 철학, 세종의 고뇌가 섞인 일화들을 읽어낸다. 그리고 세종의 발걸음을 따라 거닐며 전각들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모아 경복궁 전체에서 세종이 만들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체성’을 발견해내고 만다. 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얘기를 담은 본격 ‘경복궁 스토리텔링’이다.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아닌

-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정체성이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경복궁을 돌아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 보이게 된다. 흔히들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하며 그 크기에 위압되어 경복궁을 자금성의 짝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완공의 선후를 따지자면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25년이나 먼저 만들어졌다. 전각의 칸수에 있어서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자금성을 ‘위압적일 만큼 크다’고 생각하는 반면 경복궁은 ‘아담하고 작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각각의 궁궐에 사용된 건축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좌우대칭의 엄격함으로 웅장함을 강조하는 자금성의 설계방식과 달리 경복궁은 조화를 추구하는 짜임새를 강조한 설계방식으로 건축되었다. 건축물의 모양 역시 웅장함보다는 그 실용성과 상징성을 위주로 만들어졌다.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설계 사상인 것이다.



이렇듯 두 궁궐의 설계 사상이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추구하는 정치의 이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교적 통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해도 조선과 중국의 방식은 다르며, 이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화두를 안고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찾아야 할 정체성은 무엇인가?

- 지금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해서 조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때




노무현 정부가 개혁군주인 정조의 이미지를 앞에 내세워 이미지 혁신을 꾀했듯이,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새 정부를 대표할 인물상을 찾아 역사책을 뒤적이곤 한다. 그러나 이번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그 롤모델이 세종대왕이 될 거라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던 것 같다.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양자대결이던 지난 대선에서도 두 후보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경쟁하듯 대규모 유세를 벌였다. 심지어 박근혜 후보가 당선 확정 직후 제일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도 세종대왕 동상 앞 특별무대였다.



어떤 이들은 박근혜 후보와 세종대왕과의 공통점을 애써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세종대왕과 박근혜 모두 쿠데타로 집권한 절대자(혹은 독재자)의 아들 혹은 딸이며,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었던 긴 시간을 갖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야 어찌되었건 2013년 대한민국에 세종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에는 다들 이견이 없는 듯하다. 지금은 둘, 혹은 셋으로 갈라진 사회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나갈 대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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